한밤의 고요가 도시 소음, 바람소리와 숨소리까지 모조리 집어삼켰다. 하늘은 까만색으로 낮게 깔려서 안개 같은 남회색 구름의 움직임이 선명했다. 혼자서 슬퍼할 틈조차 내겐 주어지지 않을 것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는 장식품으로 치장된 집들과 주택 사이사이에 진열돼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나 산타클로스 모형 같은 것들이 수선스럽게 새해를 예고했다. 나는 분주한 연말을...
나는 너 때문에 무너졌지만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대신 네가 나를 원망하며 평생 열대야에 시달릴 테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내 흔적이 너를 괴롭히면 너는 차라리 처음부터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불꽃처럼 피어 올릴 테다. 구멍 난 가슴은 메워지지 않아 너를 부르짖었다. 어쩌면 네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 열기에 너의 자취를 파묻고 고여버린 ...
이진의 손에 일모의 힘이 조금 들어갔다. 주먹을 꽉 쥐려야 쥘 수가 없었다.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이진의 눈은 슬며시 감겼다. 한 손에는 크고 장엄한 서체로 ‘고소장’이라고 쓰여 있는 종이를 쥐고, 다른 손은 둥그렇게 말려들어간 채로 잠이 들었다. 스르르 블랙홀로 빨려들어 갔다. 아주 새하얀 공백 가운데서 석묵 같은 까만 점들이...
유림은 쌍꺼풀이 깊고 앞머리부터 꼬리까지 날렵한 곡선을 그리는 예쁜 눈과 단발머리에 어울리는 둥근 얼굴형을 가졌다. 외관이 갖는 장점은 그 둘뿐이었다. 비만 체형은 어렸을 때부터 비웃음을 샀고 명절에 온 가족이 모였을 때는 항상 살 빼라는 얘기를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공부 잘하는 지적인 아이’로 이미지를 굳히고 나서야 아이들의 거리낌 없는 야유가 그...
매캐한 냄새가 호흡기관을 타고 흉부에 전염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져 옷깃에 스며들었다. 다시 눈물샘이 팡 터졌다. 두 번째 눈물은 그전 것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 타고 흘렀다. 울음을 반복했다. 터진 입술이 욱신거리고 퉁퉁 부은 뺨이 아렸다. 손톱으로 할퀸 듯한 이마의 상처가 찌릿했다. 알싸한 공기는 혀끝을 얼...
가까스로 비가 멎고 안개가 걷혔을 때, 구름을 뚫고 마침내 드러난 저녁 태양이 불그스름한 빛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내내 어둑어둑했던 하늘이 겨우 밝아져서 안온한 황혼이 온 세상을 포근하게 덮는 것 같았다. 기연의 젖은 우산에서 빗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져 땅을 두들겼다. 젖은 땅이 자박자박 밟히는 소리가 다소 소음을 냈다. 너절한 오두막 아래에 숨어 있던 길...
동이 트고 새벽이 밝았다. 초침이 째깍째깍 이동하는 소리가 온 집안을 메꾸었다. 6시 30분, 천영의 휴대폰 알람 소리에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천영과 엄마가 씻고 난 뒤 분주하게 옷을 갈아입고 얼굴에 분칠하고 있을 때 이진은 조금만 더 잘래, 이따 깨워 줘 하면서 이불 속을 뒤척이고 있어야 할 때다. 오늘은 천영의 휴대폰이 잠잠했다. 진동 ...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손거울이 부서졌다. 큰 소리가 교실의 정적을 깨면서 반 아이들의 이목이 한곳으로 쏠렸다. 그 수많은 시선 끝에는 손거울을 떨어뜨린 주범이 있었다. 시선들 속에서 이진은 순간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이들이 이진을 쳐다보는 이유는 깨진 손거울이 아니라, 그가 입술에 틴트를 바르는 중이었다는 데 있었다. 이진은 모두의 눈치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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